심미적 열정에서 내적 희열로

서정걸, 미술사



물의 미학 ㅣ

동양의 회화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필(筆)과 묵(墨)이다. 필과 묵은 자연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것들과 구별된다. 그 원리의 요체는 물(水)이다. 자연이 千變萬化하듯 筆墨의 변화는 끝이 없다. 그 오묘한 변화는 물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하다.

물은 필과 먹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며 온갖 변화를 가능케 해준다. 그런 다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생물이 공기를 통해 호흡하듯이 필묵은 물로서 호흡한다. 예술가는 그 호흡을 조절하여 자신의 기분을 표현한다. 원하는 형태를 표현하는 것은 화가의 손이며 붓이지만, 화가의 정신과 기분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물이다. 물의 조화를 이해해야 동양화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이종목 회화의 조형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그의 회화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의 조화를 통한 조형작업이다. 그것은 그가 동양화의 원리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의 미학에 대한 연구의 정점은 <물>연작에 나타나있다. 그 연작들은 이종목 회화의 이정표였다. 그 시기는 동양화 연구의 정점이자 새로운 출발의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전통과 현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원리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회화적 자유를, 회화를 통한 유희를, 회화를 통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유현(幽玄)이니 청담(淸淡)이니, 장자(長子)니 노자(老子)니 하는 거대하고 무서운 개념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물>시리즈를 통하여 물처럼 자유롭게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물>연작들을 좋아한다. 그 작품들은 오묘한 자연의 이치를 한 획의 붓질에 담아내고자 했던 대담한 시도였다. 한 획으로 큰 화면을 꽉 채울 수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거대한 여백을 지탱하고 있는 단 한번의 붓질에서 느끼는 힘이 놀라웠다. 그 힘은 오묘한 물의 작용과 필의 긴장감에서 나왔다. 극도의 긴장감은 명대(明代)의 대가 팔대산인(八大山人)을 연상시켰다. 한없는 함축과 극도의 정교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던 팔대산인의 후예를 보는 듯했다. <물>연작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 말 속에는 극도의 함축에 대한 감탄과 함께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갔다는 우려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우려는 헛된 것이었음을 다음 작업에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필묵에 대한 탐구의 극점을 경험하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화면에서는 담백함을 넘어 숙연함이 느껴졌다. 본질의 세계로 전진하여,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한 회화의 정수를 찾아내고자 한 듯 했다. 그것은 선(禪)의 세계이며 명상의 세계였다.
 

일탈과 자유 ㅣ

<물>연작을 완성했을 때, 이종목은 그 자신이 충격을 받은 듯하다. 자신도 모르게 유미주의의 극점까지 몰고 갔다는 것을 깨달았을까?(나는 그것을 꼭 유미주의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엄청난 탐미적 추구가 있었다는 점에는 수긍할 수 있다.) 그는 갑자기 함축됐던 이미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원리로 부터의 일탈. 유미주의적 사고로부터의 일탈. 고고한 이상으로부터의 일탈. 화면은 <물>에서 실험했던 추상적인 선과 점과 염(染)들로 가득 채워졌고, 그 점과 선들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풍경을 이루게 되었다. 명상적인 분위기가 생동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물이 지닌 본성의 탐구에서 자연 속에서 활동하는 실제 물의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본질과 원리에 대한 통찰에서 오는 의미심장함은 세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여유로 바뀌었다.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황새여울> 연작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을 대하고자 했다. 그리기 위해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동류가 되어 화면 속에 함께 존재하고자 했다. 그림 속에 바위는 자연의 바위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형상일 수 있다. 그리하여 無爲自然하고자 했다. 無爲란 有爲를 수용하는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하다.

<황새여울>에 이르러 그는 물의 미학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다. 물의 실험에서 실제의 물가로 나간 결과이다. 황새여울은 영월의 동강에 있는 지명이다. 그곳에서 그는 물과 바위가 주는 여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황새여울> 연작이다.

<황새여울>에서 그는 물과 돌이 이루어내는 조화의 세계를 탐구했다. 쉼없이 움직이는 물과 고요히 정지된 바위의 관계, 즉, 운동태와 정지태가 만나는 지점의 철학적 성찰을 통하여 필묵의 관계를 실험했다. 그 통찰이란 끊임없이 부딪혀 오는 물살을 묵묵히 수용하는 바위의 의연함, 길을 가로막는 바위를 장해물로 여기지 않는 물의 너그러움에 대한 통찰이다. 여울의 바위에 부딪히는 물살은 노자 도덕경의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의 물이며, 바위는 물의 上善을 몸소 실천하는 바위이다. (최근작업에 등장하는 바위이자 인간이며 바로 자신의 모습으로서 표현하고 있는 바위의 모티프는 그때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화면에서 물과 바위의 관계는 검은 농묵의 필치와 담묵의 염(染)의 조화로서 표현되고 있다. 농묵과 담묵, 선과 염이 대비되고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는 조형적 조화를 통하여 추상적 자연세계, 또는 내적 희열의 추상적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황새여울> 연작에서 색채를 풍부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에 비친 자연의 색채를 표현함으로써 물의 흔적 속에 보다 강한 생명력을 담아내고자 했다. <물>연작에서 실험했던 물의 작용을 좀더 극대화시켰으며, 필묵과 물의 관계가 아닌 자연에 존재하는 물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화면은 운동감으로 가득찬 활달한 화면으로 변화되었다. 색채의 가미를 통하여 명상적 세계로부터 현시적 세계로 진출하였다. 그의 마음 속에서 동화된 자연이, 그리고 자연 속에서 충만된 감성들이 물처럼 화면으로 흘러나왔다. 표현은 대범해지고 화면은 깊어졌으며, 공간 속에는 많은 내용들이 채워졌다.

얼마 후 그는 山으로 들어갔다. <산문(山門)> 연작들로 옮겨가면서 그는 작가로서의 한단계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원리와 의미를 놓아버리고 손끝에 자신을 맡기는 여유를 찾았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내버려둠으로써 진정한 자연과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듯 하다. 그것은 자유롭게 묘사할 수 있는 '뜻을 얻었다'라는 점을 시사한다. 선과 점들에 운율이 부여됨으로써 운동감이 증가되었다. 미끄러지고 멈추고, 강하게 또는 약하게, 가늘게 때론 굵게, 풀어졌다가 다시 응축되고, 마른 먹으로 또는 젖은 먹으로…화면의 변화를 증가시켰다. 많은 요소들이 화면에 첨가됨으로써 여백은 줄었으나 공간은 더 넓어졌다. <산문> 연작은 한 시기를 결정짓는 결론으로서의 종합단계로 옮겨가는 짧은 과정이었을 뿐이다.

행복한 그리기 ㅣ

<물>, <황새여울>, <산문>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발전되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경험과 통찰을 축적하고, 수묵을 실험하고,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 느껴진다. 그는 최근작들에서 보다 자유롭고 유쾌하게 화면을 경작해가고 있다. 축적된 감성을 조형언어로 치환시킬 때의 주저 없는 필치, 계산된 작업이 아닌 자연계의 섭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표현되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즉 그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自然이 되어 화면을 생성해내고자 하는 작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無我라고 할 수도 있겠고, 無爲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연이 그러하듯, 온갖 개념들로 의미 부여되는 것에 개의치 않는, 태연자약한 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화면은 자연계와 같은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그의 조형적 장점은 화면에 표현요소들이 많든 적든 형상과 형상들의 포치가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선과 점과 염이 이루는 조화는 여전히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그 긴장감은 의도된 긴장감이 아니라 자연 사물이 인위적 배치가 아님에도 조화로울 수 있는 자동적으로 우러나오는 긴장감이다. 그 긴장감은 팽팽한 긴장감이 아니라 여유로운 긴장감이다. 그래서 화면의 요소들은 공간 속에 편안하고 즐겁게 놓여있다. 선과 면과 점들은 평면 위에 놓여져 있지만, 산 속이나 강가의 풍경처럼 넉넉하다. 그 요소들은 서로 소통하고 있다.

그는 한 두 줄의 시구로 인생과 우주를 담아내는 禪詩같은 그리기로부터 즐거움과 행복감을 자유롭게 기술하는 수필같은 그리기로 변화했다. 그럼에도 운율은 여전히 시적인 운율을 유지하고 있다. 시처럼 힘찬 운율을 가진 수필을 읽을 때의 강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그의 감성과 성찰이 치우침 없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됨이 없이, 원리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그의 손을 통하여 기술될 수 있는 그림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물>연작 이전부터 <산문>에 이르는 긴 여정의 집대성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인식과 지식을 그의 내면 속에서 다시 재구성함으로써 그는 또 다른 변화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형태(자연)의 묘미를 마음으로 체득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동양화의 원리- 붓의 원리, 묵의 원리, 물의 원리를 알고 표현한다. 내적인 희열, 명상에서 오는 법 열,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의 희열이 작업의 순간에 일어나는 경지를 경험하고자 하는 의지로 그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작업에서 작가는 행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그의 그림을 보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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