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象假象의 자유로운 유희

이건수, 미술이론/월간미술편집장

 

"네가 꿈에 새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꿈에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니, 지금 말하는 것도 깨어있는 것인지 꿈 속에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장자, <대종사(大宗師)>편에서 공자의 말

"전에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히 나비였다. 스스로 좋아하여 마음이 평안하였는데 자신이 장주인 것을 몰랐다. 그러다가 조금 뒤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물화(物化)라고 한다." -장자 <제물론(齊物 論)>편 중에서
 

'물처럼' 연작으로 은유적이고 명상적인 수묵의 정채(精彩)를 펼쳐주었던 이종목이 또다른 변신으로, 그러나 훨씬 자유롭고 다채로운 화면 운영의 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노자도덕경> 8장의 그 유명한 어구를 들지 않더라도, 이전까지 그가 추구했던 화면은 자연에 대한 서정적인 접근과 해석, 그리고 응집되고 풀어지는 먹덩어리들과 흰 여백 사이의 긴장을 통해 인위적 요소를 극도로 배제시킨 묵상적 색채와 포치의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작에서 그는 거의 자동기술적으로 자신의 의식과 몸이 가는대로 붓을 맡기면서 득의망언(得意忘言)적, 득의망상(得意忘象)적인 본질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자세가 대상과 싸우려는 결전의 자세보다는 대상에 대한 무욕의 자세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허심한 붓놀림, 대상에 대한 공격적 필획 보다는 대상을 간지럽힌다고 느낄 정도의 무작위적인 운필을 통해, 대상 그 자체가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게 하고 있다. 기호와 추상, 꿈과 현실이 서로 유희하는 리듬감 넘치는 화면 공간이다. 따라서 과거의 그의 화풍을 노자적이라 한다면 이번 것들은 장자적 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이 바로 물화(物化), 즉 사물의 변화, 만물의 끝없 는 유전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변신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종목은 매번 개인전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시도로 다양한 주제를 보여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연과 인물, 도시의 풍경을 주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보여주었던 초기작에서, 동가루나 쇠가루를 이용한 '새' 시리즈의 재료적 변신을 거쳐, '또다 른 자연-겨울산' 시리즈에서 보여준 자연과 수묵으로의 회귀, 그리고 화면의 물질적 육성(肉成)을 버리고 정신적 관조의 세계에 집중함으로써 "먹을 통해서 물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물을 통해서 먹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은 '물' 시리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종적이고 부정적인 물의 이미지를 초월하여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물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황새여울'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실로 변화무쌍하다. 언뜻 보아서 우리는 그의 이런 다양한 변신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변신은 그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물처럼 여유로운 시각, 기존의 틀과 형식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자세 때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모든 시도들의 저변에는 동향화의 운필 효과, 여백의 무위성 등 전통적이고 근본적인 화론의 정신이 함축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종목은 줄곧 한지의 특성을 현대화하고 확대해석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특히 물과 돌 이 엮어내는 황새여울의 생명력을 또 한차례 승화시켰다는 최근작들은 새로운 시도로 관심을 끈다. 종이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채색하고, 그 발색과 발묵의 시차와 격차를 이용하면서 그 위에 무작위적인 선흔을 각인시킨 화법은 이종목의 관심이 단지 종이 위에 얹혀진 형상들의 표면적이고 거리적인 관계-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이라는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화면 앞뒤의 형상과 색채가 자아내는 지층적이고 표층적인 깊이와 밀도의 관계-차원에 닿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림의 주제와 그 주제를 받쳐주는 배경의 이분법, 화면의 전경과 후경의 대비, 종이의 앞면과 뒷면에 대한 차별을 파괴함으로써, 어느 것이 주가 되고 종이 된다는 전통주의적이고 고전주의적인 회화의 일반적인 서열체계를 해체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때문에 그의 이런 상대주의적 중첩 이미지는 기법적인 방법론에서 데리다의 차연(差延 difference)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차연 개념은 훗설의 현상학적 시간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결국 훗설의 기본적인 기호이론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관과 글쓰기를 제시한 것이다. 이종목의 묘법도 마찬가지다. 조형 언어의 의미화 과정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시간적 지연'과 '공간적 차이'를 한 화면 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인 것이다.

훗설에 의하면 인간의 체험적 시간에 있어서 과거나 미래와 무관한 순수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하는 현재순간은 과거의 기억(retention)과 미래에의 기대 (protection)가 섞여 있는 시간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지각한 언어의 의미는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 이전에 새겨진 흔적과 앞으로 새겨질 흔적,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이 오버랩된 인식인 것이다. 때문에 경험적 요소가 배제된, 경험세계를 현상학적 환원으로 제거한 순수의식, 즉 훗설의 방식대로 말해서 세계에 대한 본질 직관적인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종목은 1989년 그의 첫번째 개인전 도록 첫 페이지에 "경험은 인식에 우선한다"라고 적어 놓은 적이 있다. 십 수 년이 지나고 그 동안 많은 화경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가 경험과 인식의 대비를 통해 기존 인식의 가치체계에 대한 회의를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는 점, 단 하나의 닫혀진 개념의 그림 읽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새로운 해석으로 열려지는 다양한 형상 언어를 구사해 왔다는 점, 그래서 미술에 있어서 차연 개념을 들어 새로운 그림 그리 기를 제시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가 화면 위에 아니 화면 속에 각인시킨(그의 표현을 빌자면 "장자 속으로 밀어넣은") 그의 흔적들은 무의식에 새겨진 흔적인 동시에 의식에 새겨진 흔적이다.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 중에서 무의식의 영향력을 강하게 부각시켰지만, 만일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짓는다면, 의식 또한 무의식을 규정짓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이 현실을 지배한다면, 현실 또한 꿈의 세계를 지배한다. 꿈이 젖어 있지 않은 현실, 현실이 비쳐지지 않는 꿈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현재의 우리 삶의 흔적들은 과거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 니라 미래에도 관계하는 것이다. (This trace relates no less to what is called the future than to what is called the past. -Derrida, )

이런 무의식과 의식 세계의 교차, 인식의 권력구조와 이분법적 서열체계의 해체, 이 얼마나 장자적인가. 장자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을 잊을 것을 요구한다. 크고 작음, 아름다움과 추함, 귀함과 천함, 영광과 치욕, 옮음과 그름, 흑과 백, 생과 사를 구별하지 않고 자유롭고 활달하게 소요(逍遙)하는 자득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모든 사물이 발전, 변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인식론을 통해 사물의 고정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에 의하면 실재란 구별지음을 일삼는 인간의 인식과 형상개념을 초월한 대혼돈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처럼 인간은 자기의 분별을 버리고 언어와 지혜를 잃는 곳에서 비로소 실재와 만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혼돈화는 도에 이르는 길이며, 시간과 공간이 무(無)와 허(虛)로 돌아가게 만듬으로써 생사물아(生死物我)의 대립이 궁극적 일체로 환원되는 것이다.

마치 망량(罔兩)이라는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와 대화하는 에피소드처럼, 꿈과 현실의 모든 시비를 초월한 호접몽(蝴蝶夢)의 유희처럼, 이종목의 그림은 화면의 전면과 배면이 이루어내는 하나의 소요유(逍遙遊)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자유롭고 유연한 발묵과 힘있게 반복하면서 공간을 감싸는 필선들의 율동, 그리고 그 흔적들이 중첩되면서 자아내는 생동감은 마치 하나의 즉흥곡(improvisation)을 듣는 것 같은 감성을 자아낸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좁게는 그림의 모든 가치는) 인간(작가)의 자기 주장과 욕망과 지식의 소산임에 불과함을 간파하고 그것을 상대화시킨 <제물론>에 근거하면서 그는 자기를 버리고 상황에 따른다는 허무인순(虛無因循)의 화법을 통해 모든 가치의 대립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소 요유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번 그림들은 고립적인 미적 관조의 경도를 보여 준 '물처럼' 연작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깊어지게 되었다.

물이 고요할 때는 사람의 수염과 눈썹을 또렷하게 비춘다. 성인이 마음이 맑으면 그것은 하늘과 땅의 거울이 되고, 만물의 거울이 된다. 비어있고(虛), 고요하며(靜), 편안하고, 담담하며(淡), 조용하고(寂), 호젓하고(寞), 아무 것도 하지 않는(無爲) 것은 하늘과 땅의 평준이고 도 와 덕의 본질이다."라는 장자의 <천도편(天道)>편의 구절을 되새기는 듯 이종목은 지금 그 여울목의 시작에 와 있는 것이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