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자연에 귀의하는 그림들

박영택, 미술비평

 

이종목의 근작은 구체적인 대상을 다 지워냈기에 어떠한 형상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실타래 같은 선들의 다발 혹은 손톱으로 성에가 잔뜩 낀 유리창을 긁어낸 듯한 자국과 상처들이 자잘하고 앙증맞게 흐트러져 있다. 온갖 선의 맛들이, 효과들이 화면 가득 곰살스럽게 넘실대고 충만하다. 그 효과들은 종이의 면을 경계로 해서 겉과 속이 버무려져서 일궈낸 그런 화음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런 면에서 그의 그림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청각적으로 전환해 보여주는 그런 효과로 충만하다. 선들과 점, 얼룩과 여백의 교향곡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의 그림은 눈에 귀를 달아주고 마음에 악보를 새겨주는 그림같다. 그림은 단순한 시선의 조응에 머물지 않고 감정의 동요를 끌어내고 우리의 다양한 감각기관 전체를 자극한다. 그것은 매우 정서적이며 감각적이다. 삶의 근원적이자 본연적인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의 그림이 이런 식의 선으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그 육감적이고 활력적이자 동적이며 음악적인 선들의 운영을 흥미있게 보고 있다. 동양의 그림이란 것이 결국 선에 의한 것이라면 이 작가는 그 선이란 것을 최대한 여러 측면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성형해내고 있다는 인상이다. 근작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그 선의 구사가 인위와 무위의 경계에서 사뭇 활달해졌다는 점이다. 무위란 작위가 없다는 뜻이다. 인위를 반대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그 오랜 도가적 가르침이란 것이 여전히 동시대 동양화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것이 습관화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무위란 그 습관화됨, 길들여짐, 보는 눈의 획일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습관화된 관념을 덜어냄으로써 더 깊은 섭리를 깨달아 행위의 목적을 한층 자연스럽게 이루고자 한 것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속마음을 속박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정리하면 고요하고 밝아지 며 나아가 텅 빈 상태가 되어 자연히 작위가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절로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 이는 장자다. 모든 작위를 비웠을 때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허정(虛靜)일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밝음이 나오고, 그 밝음이 바로 근원적인 자각이자 통찰력을 지닌 지각이고, 이는 깊은 미적 관조와 직결된다고 동양인들은 여겼던 것이다. 그림 역시 여기서 멀지 않았다.

동양의 그림이란 그 불가사의한 적막함도 무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 동양의 마음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서예일 것이다. 묵의 예술인 서예는 하나의 글씨가 그것을 둘러싼 공간과 정연한 관계를 맺으면서 명확성과 그 의미를 획득하고 동시에 묵의 번짐을 적절히 조절한다. 묵은 색채성 속에서는 영원히 동결된 것이고 시각적으로는 가장 울림이 없는 색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으로 사용되는 순간, 단색으로 나 앉는 순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징하는 관념적 특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생성태를 강하게 암시한다.

바로 이런 정신과 제스처가 이종목의 근작에서 무척 많이 검출된다는 생각이다. 나로서는 그의 그림이 서예의 연장선에서 전개된다고 보이며 무위에 대한, 우연성에 대한 강조가 이전보다 훨씬 두드러졌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일정한 자신의 틀로 서서히 구체화된다는 느낌이다.
 

한지 위에 흐르는 선 ㅣ

이종목의 그간의 작업들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 속도에 부침하듯 숨가쁘게, 새로운 변신을 도모해온 시간의 축에 그의 그림의 혈흔들이 묻어 있다. 시간이란 결국 변화를 동반하고 변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심어주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은 한층 성숙하거나 모종의 완성을 향해 부단한 걸음을 심화해 가야 한다고 믿게 한다. 시간 앞에서 정지나 고정, 불변은 죄악이라고도 생각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저마다 작업을 변화시키고 다른 방법론, 주제, 기법들을 고민하고 옮겨 놓는다. 그렇다면 그림을 규정하는 큰 힘은 결국 시간인가? 한 작가의 생애를 이루는 시간의 결들이 그 작가의 그림을 만드나 보다. 그렇다면 모두 한정된 시간 안에서 소모된 결과들을 그림으로 말한다고 말해볼 수 있을까? 그림을 규정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문제다.

한 작가의 생이 동안 허용된 시간의 틀 내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시간에 대한 계획적 운용 을 그림의 세계로 보여준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나는 그림을 보면서 작가 자신의 시간, 지향하는 목표, 자기 그림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전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모하고 시간을 물화한다.

주어진 시간동안 그림에 대해 학습한 결과들이 그림으로 나앉는 것은 아닐까? 유한한 인 간의 생애동안 그림이란 걸 공부한 흔적, 깨닫거나 더러 느낌 같은 것, 지나온 생애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투영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나온 길을 보면 앞으로 가는 길의 윤곽이 잡히는 듯도 하다. 어떤 정점을 향해 육박해가는 과정으로서 그림 그리는 길들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가가 좋은 작가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그 길은 자기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길(道), 자신의 품성이나 공부한 내용이나 사유의 깊이를 추구하는 정도에 따른 비교적 명료한 길로 펼쳐져 있지 특정한 시류나 순간에 '결정'되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지나친 강박이나 새로움이나 변화에 대한 갈증이나 욕망을 슬쩍 걷어낸 자리에서 홀연히 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 흐르는 듯한 그림의 세계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가능한가?

1990년대 동안 이종목의 그림은 그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가파른 흐름, 변화를 보여줘왔다 고 기억한다. 초기작인 도시와 인물, 자연의 풍경을 수묵과 색채의 변용을 통해 매우 서정적으로 펼쳐보이던 데서 벗어나 이후 과감한 재료의 도입, 물성의 강조, 다채로운 기법의 응용, 질감의 두드러진 강조와 동세를 강조한 <새>시리즈로 옮겨갔다. 이후 그런 재질감과 기법, 질감의 극대화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고른 후 그가 부여잡은 것은 다시 자연에 대한 다분히 명상적이고 관조적이자 전통적인 동양화의 숨결로 유턴한 일련의 작업들이다. 결국 산수로 귀결되는 작업이자 수묵으로 회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다른 자연-겨울산>이나 <물시리즈>가 그것이며 동강에서 받은 느낌과 감흥을 그린 것 이 최근작인 <황새여울>이다. 지금까지 이 숨가쁜 변화가 그의 작업세계가 드러나는 실체 인 셈이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개인전을 제외한 이후의 작업은 하나의 일관된 목표 아래 조율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전통적인 동양화 세계에서 현대적인 개념을 추출해 이를 새로운 방법론으로 구현해낸다는 그런 의도 말이다.

 

또 다른 시작 <황새여울> ㅣ

두 번째와 세 번째 개인전을 마감하고 그와 같은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1992년으로 기억된 다. 그해를 지나면서 이종목의 그림은 그때까지의 분방한 실험과 다양한 재료적 체험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기의 체질과 동양화의 근간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간다. 아마도 앞서개인전을 통해 발표한 작업에 대한 회의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거나 혹은 동양화의 전통에 대해 새삼 공부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선 사생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다시 배운다는 자세로, 기본기를 다시 연마한다는 각오로 청주 근교 및 여러 산들을 찾아 사생을 한 것이다. 그런 사생체험을 바탕으로 그려낸 것이 이후의 겨울산이나 물, 지금의 황새여울로 오게 한 것 같다. 어찌 보면 그런 작업은 여전히 자연주의적 시각과 태도를 반영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산수화 세계에서 그닥 멀리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전통과 근본으로의 회귀는 여전히 이종목 특유의 감수성과 새로움에 대한 조화에 몸을 내민다. 그는 여러가지 효과와 방법론을 한 화면 내에 부단히 끌어안고 있는데 초기작에서 보여준 질감과 화면처리, 화면의 세련된 구성에 대한 갈망 등은 지금 작업에서도 고스란히 검출되고 있다. 작업이 큰 폭으로 바뀐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반성이다. 반성이 잦다는 것은 나중에는 반성의 형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현대미술이란 결국 그 현대, 지금 이 순간이란 것을 강박적으로 추종해 지속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긴다. 그것은 지난 것을 부정하고 폐기하게 한다.

또한 지난 시간을 죄악으로 몬다. 과거의 것에 대한 이 저주의 시선은 늘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그것으로 삶을 강제하게 한다. 동양화 역시 이 현대미술의 속성, 서구문화의 패턴과 시간의 주기라는 것을 힘겹게 끌어안으면서 동양화의 현대화라는 과제를 끌고 간다. 그러면 과연 시간과 변화란 무엇일까? 그림에서 시간과 변화는 무엇인가? 그림은 변해야 하는 것이고 변하는 그림이 좋은 그림인가? 그 변화는 늘상 지난 것을 반성케 하고 그 반성이 여의치 않으면 형식화된 반성을 반성으로 안고 간다.



전통과 근본으로의 회귀정신 ㅣ

동양화 수업에서 익힌 수묵 담채와 문인화적 자취는 여전히 이종목의 작업에서 버릴 수 없는 품격으로 남는다. 그는 그 품격과 체취, 아우라 같은 것을 여전히 두르고 있다. 그것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정신과 자세같이 단호하다. 그것은 거의 선험적으로 동양화라는 작업의 성격으로 규정된다. 그러다 보니 동양화 작업들이 지나치게 문기 짙은 사념과 정신에서 풀어지는 현기증나게 까마득한 경지로 울타리를 치고 둘러앉는 허위의식들이 존재할 여지를 남긴다.

그런 품격과 자취의 바탕 위에 자유로운 운필에 가까운 선의 흐름이 분방하게 흐른다. 그 것은 물살이고 물결이고 바람이고 시간이다. 드문드문 바위가 있고 자잘한 돌멩이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아마도 이종목의 <황새여울>은 그런 풍경을 그려놓은 것 같다. 그것 역시 산이자 바위이고 돌이자 물인 전통적인 산수에 와 같다. 돌과 물의 움직임과 소리를 감지하려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그리고 그런 의도는 당연히 모든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와 같은 소재를 통해 자연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보여주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황새여울이란 특정한 대상, 자연은 무의미하다. 그는 다만 그 대상을 빌려 자신이 체득한 자연에 대한 관조와 명상 등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이는 겨울산에서 물을 거쳐 지금에 도달하고 깨달은, 자신이 겪은 자연체험의 연장선에서 길어 올리는 결정같은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직접 만난 자연체험, 추상이나 허상에서 출발하는게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에서 시작해 여기에서 느낌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사셍에서 의취를 길어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곤 여기서 더 멀리 나간다. 자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자연에서 가장 멀리 나갈 수 있는 지점을 공략한다. 물결의 미세한 떨림을 그리고 싶어하고 돌의 묵직한 덩어리감, 그 존재성을 표현하고 싶어하고 구름이 물살에 흔들리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싶어한다. 또한 바람이 수면에서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한다. 그것은 매우 낭만적이고 감수성 짙은 자의 시선에 비치는 자연의 한 초상이다. 그런 것들은 분명 눈에 보이지만 그림으로 표현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한 그 경지는 그래서 작가에게 매력적인 지점이 되나보다. 자연은 결국 한 인간의 육체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그림이란 결국 그 자연에 대한 해석이자 느낌이고 깨달음이다.

 

문인화적 심상의 흔적 ㅣ

일산 작업실에는 그 동안 써놓은 서예가 수북하다. 여전히 서예를 통한 필력과 기본기를 충실히 익히려는 마음의 배려를 만난다. 어쩌면 그의 최근작은 초서와 흡사하다. 그런 서예를 통한 훈련이 자연스레 작업으로 드러나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그는 동양화의 기본기, 즉 서예, 전각, 사군자 등을 부단히 익히고 이와 같은 전통적 문맥에서 현대적인 개념을 추출해 이를 다시 시대에 맞게 그리려는 의욕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동양화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범주를 나름대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이를 다시 확대 해석해 놓은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그의 그림이 매우 전통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수묵이 지닌, 서예가 본디 지닌 추상 표현적 표현성, 물리적 속성 및 운필 본연의 서예적 추상표현의 본질을 조형차원에서 적극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만난다. 사형취상(捨形取象)하는 동양적 조형원리와 심상을 표현한다는 문인화의 사의정신을 되살리되 그러면서도 세련된 조형의식과 방법론의 연출을 보여준다. 무작위로 끄적거린 선들의 유니크 한 맛, 곰살거리는, 간지럽히듯 화면 전체를 누비고 다니는 선의 맛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어째 보면 톰블리나 타피에스의 선의 맛에 프랑캔탈러의 색채의 번짐같은 것들이 동양화와 혼재된 그런 느낌을 강하게 자극한다.

이 드로잉적 선들은 모필과 나이프 전체를 활용한데서 또는 머리빗이나 손등과 손가락, 손톱 등을 자유로이 끌고 다니는데서 풍성한 맛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런 긁힘과 스침, 종 이의 섬세한 피부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마치 전각처럼 찍히는 효과나 화면에 얇은 요철 효과를 동반하는 것은 그가 초기작부터 즐겨 구사하는 방법에 다름아니다. 그의 화면은 여전히 많은 효과와 기교가 넘실거리는 장이다. 그런 것들로 무수히 주름이 잡히고 흔적이 동반되는 생성의 장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내게는 그의 작업이 한지와 수묵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 속에서 최대한의 효과나 기법이 실현될수 있고 새로운 조형효과를 낼 수 있음을 가시화하는 연출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그것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발생한다. 화면의 앞부분에서만 그림이 연출되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뒷면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른바 배채기법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배채란 화면 뒷면에다가 그려 종이 앞으로 배어나오는 그림을 말한다. 그것은 은은한 우리네 선조들의 심성을 닮았다. 종이의 앞면과 뒷면은 전적으로 상호작용한다. 뒷면에 먹색을 깔고 나이프로 뭉개거나 자욱을 남기면 앞면에 그 자취가 배어나온다. 다시 앞면은 그 뒷면에서 나온 흔적을 참조로 또 다른 흔적들을 남기게 된다. 하나의 시간이 또 다른 시간의 연으로 이어지고 참조가 되는 그런 그림이다. 따라서 그림 속에는 여러 시간의 층들이 겹겹이 쌓여있고 흐르고 있다.

그의 그림은 전적으로 선과 선이 자아내는 다양한 맛과 감촉에 있다. 그 선들은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 자체로 활달한 표정과 자유로운 몸을 지닌 채 부유한다. 종이 위에 돌처럼 바람처럼 물살처럼 흐르고 머물고 고여있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육체가 되고 마음이 되어 그 선들의 부유와 함께 한다. 선과 소요하는 경지를 꿈꾸는 듯한 이런 제스처는 일찍이 <겨울산>에서부터 감지되던 것이다. 그는 그런 경지를 꿈꾸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경지, 제스처가 지나치게 그림을 관념화 시킬 수 있다는 아쉬움이 든다. 그러니까 진정한 자연체험, 깨달음이라기보다 그런 '코스튬'으로 부단히 함몰될 수 있다는 아쉬움 말이다. 그런 아쉬움을 경계한다면 지금의 <황새여울>에서 훨씬 진전된 자연에의 깨달음이 그만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방법론으로 몸을 내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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